
대미 수출 전선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가운데 종잡을 수 없는 트럼프 관세 정책이 더욱 기업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특정 국가에 대한 관세 부과를 발표했다가 이를 철회하는 오락가락 행보를 보이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은 대미 투자 유도 등을 위해 관세를 ‘협상 카드’로 사용하는 비즈니스맨”이라며 “기업 입장에서는 깜짝 관세 부과 가능성에 소홀한 대응을 하기 어려운 형국”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에 대해 10% 관세와 10%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어 이달 12일부터 철강·알루미늄 제품에 면세 조항 등을 없애고 25% 관세를 부과했다.
이런 예외 없는 보편관세에 국내 기업들은 민감할 수밖에 없다. 다음 달 3일에는 한국 핵심 수출품인 자동차와 반도체에 각각 25% 이상 관세가 부과될 예정이다.
관세 파급력은 복합적이다. 미국 수입상대국 1~3위 국가인 멕시코·중국·캐나다는 미국 정부 현재 타깃이다. 이미 추가 관세까지 부과한 중국을 제외하면,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캐나다에 대한 핀셋 관세 시행 여부는 다음 달 3일 결정한다는 입장이다.
이들 3국은 한국과 수출 경쟁을 하는 국가로 관세 도입 시 우리가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다.
다만 한국도 미국 수입상대국 7위다. 언제든 트럼프 대통령의 타깃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무역협회는 수출입통계(작년 1~11월) 등을 활용해 미국 관세 정책이 시행될 경우 대미 한국 수출에 미치는 영향을 시나리오별로 추정했다.
중국 10%, 멕시코·캐나다 25%, 보편관세 10%가 적용될 경우 대미 수출이 작년 대비 100억3000달러(약 14조5400억원) 줄어든 1177억7000달러(약 171조원)를 기록할 것이라는 추산이다. 반사이익으로 늘어난 수출액 29억 달러보다 보편관세로 인한 마이너스 효과가 129억3000달러로 손실이 훨씬 크다.
무역협회 측은 “미 관세 정책에 따른 감소폭이 10.1%로 반사이익으로 인한 증가분 2.5%를 압도한다”고 말했다.
한국 주력 수출품인 자동차는 부정적 영향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차·기아가 고부가 SUV 모델 판매 호조로 미국 시장에서 역대 최대실적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멕시코에서 완성차 공장을 운영하는 기아의 경우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 대표 생산 차종이 단종된 K3를 대신해 작년 8월부터 양산하고 있는 K4인데, 현재 미국에서 인기다.
지난달 K4 미국 판매량은 1만1669대. 스포티지(1만3072대) 다음 인기 차종이다. 기아 관계자는 지난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멕시코에 수출 제재가 가해진다면 캐나다로 선적을 늘리는 등 방법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전업계는 ‘세탁기 트라우마’가 있다. 삼성전자, LG전자 모두 지난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세탁기 관세 압박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에 각각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뉴베리와 미국 테네시공장에서 가전제품 생산을 시작했다.
다만 대부분 미국향 제품은 미국·멕시코·캐나다 3국 간 자유무역협정(FTA)을 이용해 여전히 멕시코에서 생산되고 있다.
양사 미국 공장 생산량은 연간 100만대 수준에 불과하다. 멕시코 생산 물량은 최대 1200만대에 달해 관세 정책에 따라 큰 피해가 예상된다.
멕시코 생산 물량을 미국 공장으로 이전하는 방안도 있지만 이마저도 추가 투자는 물론 인건비 상승에 발목 잡힐 수 있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미국 노동자 1명 임금은 멕시코 노동자 8명 수준”이라며 “미국 생산을 늘리려 해도 인건비와 추가 인프라 구축 등 출혈을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 최대 수출품목인 반도체는 대미 투자 압박을 받고 있다. 바이든 전 대통령 시절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370억 달러를 들여 최첨단 파운드리 공장을 짓기로 하고 47억4500만 달러 보조금 지원을 약속받았다.
SK하이닉스도 웨스트라피엣에 38억7000만 달러를 투자해 HBM 패키징 시설을 건설하며 4억5800만 달러 보조금과 5억 달러 규모 대출 지원을 체결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삼성·SK하이닉스는 연일 보조금계약 철회와 추가 투자를 종용받고 있다. 대만 TSMC가 향후 4년간 1000억 달러 규모 천문학적 대미 투자를 발표하며 상대적으로 압박 수위가 한층 높아지는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직접 거론하기도 했다.
만약 보조금 계약이 파기되거나 삭감 조치를 받을 경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기존 계획보다 투자 규모를 확대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제약·바이오 업계도 트럼프 관세 정책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한국 의약품은 한미 FTA에 따라 필수품으로 분류돼 무관세 혜택을 받고 있다. 관세가 붙으면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국내 바이오 기업들은 대규모 관세가 부과되기 전에 일단 미국에 재고를 쌓아두는 단기책을 꺼내들었다.
셀트리온은 올해 미국에서 판매할 재고분 9개월치를 현지에 미리 옮겼다. 상반기 중 미국 내 원료의약품 생산시설 확보를 위한 투자 결정도 마무리할 예정이다. 미국 비중이 80%인 SK바이오팜도 6개월분 물량을 현지에 준비해 놨다.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은 생산시설도 마련해놓은 상태다. 회사는 추후 트럼프 정책 흐름에 따라 현지 생산 파트너십을 강화할 방침이다. 물론 수혜를 기대하는 업종도 있다. 조선 분야다. 상대적으로 취약해진 미국 조선업 경쟁력 덕분이다.
미국은 1980년대 냉전체제 완화 이후 잇달아 조선소를 폐쇄하는 바람에 조선업 경쟁력을 많이 상실했다. 이 때문에 동맹국과의 공조가 필수적이라는 분석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한국 군함 및 선박 건조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특수선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한화오션은 미 해군 7함대 소속 군수지원함과 급유함 MRO 사업을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지난해 한화그룹은 미국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필리조선소를 인수했다. 또 다른 기업인 HD현대중공업은 아직 미 해군 함정 MRO 사업을 수주한 실적은 없지만, 미 해상수송사령부 7함대 소속 군수지원함 1척에 대한 MRO 사업 입찰에 참여한 상태다.
방산의 경우 아직 국내 방산업체가 미국으로 수출하는 업체는 업다.
다만 미국과 유럽의 '대서양 동맹' 분열이 가시화되면서 동유럽뿐만 아니라 중동,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수출이 증가할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에 국방비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지난 2014년부터 회원국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2% 수준으로 방위비를 권고하고 있는데, 트럼프 대통령을 5%를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동맹국이 자국 방위를 위해 국방비를 증액하고 무기 수입을 확대할 것으로 보여 국내 방산업체들에게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
곽호룡 한국금융신문 기자 horr@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