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후 15년 이상이 지났지만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진국들의 경제 성장률은 매우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많은 국가들은 자국 경제가 일본과 같이 인구 고령화와 낮은 생산성에 따른 저성장이 장기간 유지되는 상태를 의미하는 소위 경제적 일본화(Japanification)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고 있다.
2010년 유로위기(Euro Crisis) 이후 유로지역(Euro area)은 저성장과 저물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에도 코로나 발생 이후 소비심리 둔화, 주택 불황, 지방정부 부채 급증 등에 따라 매우 취약한 경기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물가도 도매물가지수가 2024년 12월 기준으로 27개월 연속 하락했으며 소비자 물가 상승률도 2013년 12월에 비해 0.1% 상승하는데 머물렀다.
많은 이코노미스트와 애널리스트들은 중국 경제가 이미 경기침체와 저물가 상황이 지속되는 디플레이션에 진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 정책당국은 디플레이션 심리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이코노미스트와 애널리스트들에게 디플레이션 용어 사용까지 금기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경제적 일본화를 피하기 위해 정책당국자들과 학자들은 1990년대부터 진행된 일본의 위기와 대응을 살펴보면서 교훈과 시사점을 찾기 위해 일종의 부검을 실시하고 있다.
일본의 위기가 이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첫째로 버블 붕괴 전 전세계에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일본 경제가 버블 붕괴 후 왜 갑자기 저성장, 저물가, 저금리로 대변되는 장기 불황이 수십년간 진행된 상태로 전락했는가에 관한 의문점이다. 일본 경제의 불황이 버블 붕괴로 인한 민간 수요의 부족에 있었다면 불황이 장기화될 수는 없다. 팽창적인 통화와 재정정책을 통한 수요 진작으로 장기 불황은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둘째로 위기 당시 일본 경제는 인구 고령화와 저출산의 급진전, 재정 세수의 부족 등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현재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겪고 있는 현안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세 번째로 일본 정부가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구조개혁에 늑장 대응한 배경으로 정치적 리더십 부족이 자주 지적되고 있는데 많은 국가들이 처한 정치 상황도 일본과 유사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국가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선출직 정치인들이 장기적으로 국가 경쟁력을 결정하는 구조개혁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재선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행태를 잘 나타내는 것은 룩셈부르크 총리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 위원장을 역입한 장크로드 융커(Jean-Claude Juncker)의 발언이다. 2014년 6월 그가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으로 지명되면서 유럽경제가 저성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구조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유럽의 정치지도자들은 어떤 조치가 필요한지는 잘 알고 있지만 이러한 조치를 시행했을 때 우리가 다시 선거에서 당선될 수 있는 방법을 모른다”라고 답변했다.
선진국들 중 처음으로 일본의 1990년대 위기에 대해 심도 있게 분석한 연구는 2002년 6월 미국 연준이 발표한 “디플레이션의 방지: 일본의 1990년대 경험의 교훈(Preventing Deflation: Lessons from Japan’s Experiences in the 1990s)”이다.
연준이 이러한 연구를 하게 된 배경은 연준이 2001년초부터 정책금리를 4.75%포인트 인하해 1.75%까지 낮췄다. 이러한 큰 폭의 금리 인하에도 불구하고 고용사정은 호전되지 않았다. 연준은 명목 금리가 제로 금리 하한(zero lower bound)에 도달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경우 전통적 통화정책 수단이 무력화되는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했다. 연준은 1990년대의 일본 경험을 면밀히 분석해볼 필요가 있었다.
연준은 일본의 1990년대의 버블 경제의 정점과 그 후의 성장 둔화 과정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선진국의 경기 순환과정과 유사한 형태라고 평가했다. 일본의 경우에는 자산 버블 붕괴에 따른 가계와 기업의 대차대조표상 순자산 가치 폭락, 금융기관의 부실자산 증가, 엔화 강세 등 경기 하락을 이끄는 일본 특유의 요소들이 가세했다는 점은 인정했다.
디플레이션의 사전 예측은 불가능했지만 통화 및 재정 정책을 과감한 팽창기조로 조기에 전환했으면 디플레이션을 방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이 보고서의 결론이다.
연준의 보고서는 순수한 경제적 측면에서 전개과정이 이미 알려진 일본의 경제 위기에 대한 대응정책을 모델을 이용해 시뮬레이션한 것이기 떄문에 사후약방문과 같다는 점에서 분명히 한계는 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연준이 6년 후 글로벌 금융 위기에 대응할 때 이 보고서를 매우 유용하게 사용했다고 본다.
연준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정책금리를 2007년 9월의 5.25%에서 2008년 12월에는 0-0.25%로 신속하게 대폭 인하했다. 정책 금리가 0%까지 인하되어 제로 금리 하한에 도달해 금리 인하 등 전통적 통화정책 수단의 효과가 의문시되자 연준은 미래의 금리 수준에 대한 시그널을 통해 장기 금리를 낮추는 소위 선도적 안내(forward guidance)와 대규모 자산 매입 프로그램 또는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 등 비전통적인 정책수단을 신속하게 동원했다. 그 결과 연준은 192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기침체를 비교적 빠른 시일 안에 회복시킬 수 있었다.
6년전 일본의 경험을 면밀하게 연구한 연준의 선견지명이 디플레이션 발생을 방지하고 경기를 회복하는데 상당히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김성민 전 카이스트 금융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