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원태 기자
30대 중반의 나이에 접어드는 나에게도 계엄이란 전혀 익숙하지 않은, 어떤 낡은 것의 개념이었다. 어쩌면 어릴 적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배웠던 군부독재에 관한 설명이 기억으로 자리했던 것 같다.
고물가·고금리·고환율 등 ‘3고(高) 현상’이 장기화하면서 국내 경기는 한파와 함께 얼어붙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저성장, 저출생 기조가 심화하면서 기업들의 자금 사정도 코로나보다 더 맹렬한 추위에 부닥쳤다. 희망퇴직이나 구조조정 이슈가 심심찮게 들려오고, 비상경영에 돌입한다는 이야기도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K팝, K콘텐츠, K푸드 등이 글로벌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음에도 내수는 딴판이다. 이상 기후로 작황이 부진해지면서 커피 원두, 카카오, 올리브유 등 식품 원부자재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서구권과 중동권 전쟁으로 유가마저 불안정한 상황이다.
하지만, 국내 정치는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고학력·고숙련·고연령 등 ‘3고(高) 현인’들이 민의의 전당인 국회만 들어서면 싸움닭으로 돌변한다. 대통령도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헌법을 수호해야 하지만, 계엄으로 위헌 논란에 휩싸였다.
이들 모두 선거철만 되면 민생을 책임지겠다고 외치지만, 표를 받고 난 이후엔 일고의 협치도 보여주지 않았다. 민생은 뒷전, 여야로 갈라지고 그 속에서 또 계파로 쪼개지며 다시 이합집산, 꼴사나운 모습만 연출했다. 그저 어느 쪽에 줄을 서야 자신에게 유리한가, 이 계산뿐이다. 국민을 상대로 또 거짓말을 내뱉었다.
우리의 정치는 상대를 완전히 죽여야만 끝나는 ‘제로섬(zero-sum) 게임’이다. 그렇다면 이를 중재해야 할 대통령은 어떠한가. 오히려 한술 더 뜬다.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이나 사람들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우더니 이제는 궁예가 된 듯 관심법으로 구국 영웅의 이데올로기마저 재단하고 있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모두 국민이 선출한 국민의 대변인이다. 국민의 삶 속에 애환을 보듬어주고, 이를 정책으로 반영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임무다. 그러라고 국민이 세금으로 월급을 준다. 그러나 정치는 양극단으로 치달을 뿐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
윤석열닫기윤석열기사 모아보기 대통령의 비상 계엄령은 충격이란 말만으론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우리나라에선 45년 전, 미얀마 정도에서나 현재진행형으로 발생하던 일이 느닷없이 눈앞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포고령을 보면서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 언론사에 종사하는 필자로서는 계엄사의 통제를 받으라는 문구가 섬뜩하게 다가왔다. 우리의 문화자산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왜 정치는 자꾸만 후퇴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통령도 국회도 서로를 적대시했다. 탄핵과 거부권이 남발하면서 민생은 물론 정치 자체가 실종됐다. 초등학생도 이러지는 않는다. 학교나 가정에서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을, 그들은 자식이나 손주에게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대통령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국회 개원식에 불참했으며, 뒤이어 열린 예산안 시정연설도 총리를 대신 보냈다. 자신이 가야 할 국회에 무장한 군대를 보내 위력을 과시했다. 다행히 국민이 나서 군대를 막았고, 국회의원들은 담장을 넘어 계엄을 해제했다. 민생을 최우선으로 섬기겠다는 말들이 공염불처럼 맴돌았다.
대통령은 12월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14일 탄핵 가결까지 다섯 번의 담화를 했다. 첫 번째 담화는 국회를 향한 분노를, 두 번째 담화(4일)는 국회 결의안에 따른 계엄 해제를, 세 번째 담화(7일)는 탄핵을 앞둔 자신의 거취를, 네 번째 담화(12일)는 계엄의 정당성을, 다섯 번째 담화(14일)는 법적 시비를 다투겠다는 각오를 담았다. 일관성은 없었다. 그때그때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하려는 대통령의 다급함만 엿보였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12일 발표한 네 번째 담화였다. 계엄 이후 우리나라의 대외 신인도 추락은 물론이고 골목상권은 아수라장이 됐다. 정치 불안까지 더해지면서 원화는 약세를 그리며 고꾸라졌고, 미국의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도 우리 외교는 사실상 중단됐다. 계엄 관련해서는 무속과 연관됐다거나 북한을 자극해 전쟁을 유발하려 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대통령이 부정선거를 강하게 의심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하나같이 충격적인데, 현역 장병들까지 계엄에 투입됐다고 한다. 상관의 명령과 위법 사이에서 고뇌한 수많은 군 장성과 경찰 간부들은 줄줄이 옷을 벗었다. 그런데 정작 책임을 져야 할 대통령은 경고성 차원일 뿐이었다며 계엄을 퉁치려고 든다. 법적 책임을 지겠다던 대통령은 수사기관도 헌법재판도 무시하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이달 10~13일 국내 수출 중소기업 513곳(제조업 463곳, 비제조업 50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계엄 이후 정치적 불확실성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본 곳의 비율이 26.3%로 집계됐다. 이들은 ▲계약 지연·감소·취소(47.4%) ▲해외 바이어 문의 전화 증가(23.7%) ▲수·발주 지연·감소·취소(23%) ▲고환율 문제 발생(22.2%) 등의 피해를 봤다고 응답했다.
실제 달러/원 환율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3월 이후 최고 수준인 1450원을 돌파, 어느덧 1500원을 향하고 있는 상태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12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88.4로, 전월보다 12.3p 하락했다. 이는 2022년 11월(86.6) 이후 최저치이자 코로나19 기간이던 2020년 3월(18.3p) 이후 최대 감소폭이다.
난감한 현실은 주변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음식점을 하는 자영업자 A는 주말 매출이 80% 넘게 줄었다며 하소연했고, 재테크에 관심이 많던 친구 B는 국내 증시로 속앓이를 하고 있다. 영화 스태프로 일을 하던 선배 C는 정부 예산이 끊기면서 백수 신세가 됐고, IT 회사에 있던 지인 D는 최근 경영 악화로 퇴사 위기에 처했다며 시름을 토했다. 가뜩이나 경제가 엉망인데, 정치마저 불안정해지면서 정부도 국민도 ‘아노미 상태’에 빠지게 됐다.
계엄은 전시나 사변, 그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로 사회가 극도로 혼란할 때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 대통령이 선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계엄 사태가 터진 12월 3일은 국민 대부분이 너무나도 평화로운 날이었다. 대통령은 계엄을 선포한 직후 국회에 통고해야 하지만, 그마저도 지키지 않았다. 오히려 계엄 선포 직후 무장 군인을 시켜 국회 본청으로 진입을 시도한 점은 위헌 논란으로 불거졌다. 무엇보다도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포고령 조항은 국헌 문란으로도 확대되고 있다.
결국, 양극단으로 치닫던 정치의 ‘제로섬 게임’에 온 국민이 끌려들어가는 형국이 됐다. 계엄령이 할퀸 상처는 곳곳에서 상흔을 내고 있는데, 연고를 발라야 하는 것은 또 국민 몫이다.
손원태 한국금융신문 기자 tellme@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