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2일 오전 서울 남대문로 한국은행에서 한국은행 창립 제73주년 기념사를 낭독하고 있다. / 사진제공= 한국은행(2023.06.12)
이미지 확대보기이 총재는 이날 오전 서울 남대문로 한은에서 열린 창립 73주년 기념사에서 "한은의 진정한 실력을 검증받는 한 해가 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 총재는 창립기념일은 매년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올해는 새 단장을 마친 보금자리로 6년 만에 돌아온 해이기에 더욱 의미있게 다가온다고 짚었다.
총재 부임 이후 1년을 보내고 맞이하는 첫 창립 기념일이라고 한 이 총재는 "급박한 경제상황 속에서 함께 해결책을 찾아 쉼없이 움직였던 한 해였다"고 소회했다.
주요국 물가가 빠르게 상승하는 가운데 한국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작년 2022년 7월 6.3%까지 높아졌고, 이에 한은은 기준금리를 3.5%까지 인상하는 등 발빠르게 대응해 다행스럽게 물가오름세는 지난 5월 3.3%까지 낮아졌다고 짚었다.
이 총재는 "다만 기조적 물가흐름을 나타내는 근원인플레이션은 아직 더디게 둔화되고 있어 안심하기에는 이른 상황"이라며 "앞으로도 인플레이션 둔화 속도를 면밀히 점검하는 가운데 성장의 하방위험과 금융안정 측면의 리스크, 그리고 미국 연준 등 주요국의 통화정책 변화도 함께 고려하면서 정책을 더욱 정교하게 운용해나가야 하겠다"고 말했다.
작년 하반기에는 미 연준이 금리인상 기조를 가속화하는 가운데 원/달러 환율이 급등했고, 단기자금 시장 사태가 겹치면서 금융·외환시장 불안이 심화되었다고 짚었다. 한은은 정부·감독당국과의 긴밀한 정책 공조를 통해 적극적으로 시장 안정을 위해 노력했고 위기 극복에 일익을 담당하였다고 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튼튼한 은행 부문이 큰 버팀목 역할을 해 주었다고 언급했다.
이 총재는 "최근에는 주택시장의 부진이 완화 조짐을 보이고 있으나 부동산 대출 연체율이 상승하는 등 금융부문 리스크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며 "중장기적 시계에서는 금융불균형이 재차 누증되지 않도록 유관기관과 협력하여 가계부채의 완만한 디레버리징 방안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영인사 혁신방안' 도입을 통해 토론문화 확산, 자료공유 확대 등 조직문화 개선을 위한 노력도 시작했다고 제시했다.
이 총재는 "여러분의 협조 덕에 ‘한은사(寺)’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시끄러운 한은’을 향한 긍정적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경제현안과 관련한 많은 보고서들이 외부로 공개되고 지역본부 직원들이 한은의 앰배서더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음에도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총재는 "급여 문제나 권한의 하부위임, 워크 다이어트 등과 관련해서는 아직 그 성과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좀 더 시간이 필요한 사안들인 만큼 앞으로도 개선 노력을 이어나가야 하겠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쉽지 않은 1년을 보냈지만, 앞으로의 1년도 녹록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이 총재는 " 한은의 진정한 실력을 검증받는 한 해가 될 것"이라며 "지난 1년간은 우리를 포함한 대부분의 중앙은행들이 높은 물가상승률로 인해 공통적으로 빠르게 금리를 인상하였고, 우리 국민 사이에도 물가안정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으나, 그러나 올해는 국가별로 물가오름세와 경기상황이 차별화된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며 "그 결과 물가와 성장 간 상충관계(trade-off)에 따른 정교한 정책대응이 중요해졌으며, 그 과정에서 각국 중앙은행의 능력이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조직운영 측면에서도 가시적인 성과 없이는 조직 혁신에 대한 실망이 늘어날 것이라며 이 총재는 "손에 잡히는 결과물을 도출하기 위해 한층 노력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새로운 환경에 맞게 과감히 변화를 준비해야 한다고 짚기도 했다. 지금까지 한은의 주된 정책대상은 은행이었지만, 비은행의 중요도와 시스템의 복잡성이 증대되었기에 은행만을 대상으로 해서는 국민경제 전체의 금융안정 목표를 달성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짚었다.
이 총재는 "비은행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권이 없다는 이유로 이 문제를 방치할 수는 없다"며 "감독기관과의 정책공조를 더욱 강화하고 필요하다면 제도개선을 통해서라도 금융안정 목표 달성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동성 관리 수단의 유효성도 짚었다. 이 총재는 "이제까지는 기조적인 경상수지 흑자로 국외부문으로부터 대규모 유동성이 계속 공급되어 왔기 때문에 한은의 유동성 관리 또한 이를 흡수하는 방향에 초점을 맞추어 운용되어 왔으나, 대내외 경제구조가 달라지면서 경상수지 기조는 물론 적정 유동성 규모 등이 변화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며 "따라서 유동성 조절도 흡수 일변도에서 벗어나 평상시에도 탄력적으로 유동성 공급이 가능하도록 제도나 운영방식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제시했다.
아울러 그는 "최근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 등에서 볼 수 있듯 모바일 뱅킹 등 IT기술 발달로 기관 간 자금흐름이 대규모로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위기 전파 속도도 그만큼 빨라졌다며, 새로운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상시적 대출제도 등 위기 감지 시 즉각 활용 가능한 정책 수단의 확충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빠르게 발전하는 IT기술을 활용해 챗GPT와 같은 소프트웨어를 내부 업무에 적용하여 일상적인 업무의 효율성을 향상시키는 방안에 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고, 소액결제시스템을 실시간총액결제 방식으로 전환하고,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도입하는 데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해나가야 하겠다고 제시했다.
내부경영 관련해서 이 총재는 "민간부문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우수 인재 확보에 대한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며 "우리의 급여와 복지 수준이 이들과 경쟁할 수 있을 정도로 개선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짚었다.
또 이제는 우수한 인재를 뽑는 노력 이상으로 들어온 직원을 최고 수준의 전문가로 양성하는 방향으로 인사정책도 변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 총재는 "명문대 졸업장 하나가 뛰어남을 인증하는 시대는 지났다"며 "업무와 관련된 지식이 빠르게 진화하고 있으므로 각자가 자기 계발을 통해 전문성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고 조직은 이를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수한 인재여야 한은에 들어간다'는 과거의 평판에서 벗어나, 이제는 '한은에서 10년 동안 훈련받은 직원이라면 믿고 스카우트하고 싶다'라는 말이 정착되도록 노력하고 투자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 총재는 "이를 위해서는 하위 직급에서부터 주요 결정을 책임지고 수행할 수 있도록 직무 권한을 실제적으로 하부위임해야 한다"며 "전행적(全行的)인 정보 공유를 통해 우리 내부의 정보독점화를 막고 모두가 대변인이라는 마음가짐으로 각 분야의 전문가로서 적극적인 대외 소통에 나설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변화에 앞장서는 직원이 더욱 대우받을 수 있도록 인사와 성과평가 제도로 뒷받침하겠다"고 말했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에 주목했다. 특히 젊은 직원들이 그 변화의 한 가운데 우뚝 서 주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 총재는 "요즘 젊은 세대들이 업무지시에 대해 ‘왜요?’, ‘제가요?’, ‘지금요?’라고 되묻는 경향이 많다고 들었는데, 저는 한은에서 이러한 질문을 더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하는 문화가 정착되면 좋겠다"며 "저는 '왜요?-변화가 필요하니까', '제가요?-변화의 필요를 가장 잘 느끼는 세대이니까', '지금요?-지금 변하지 않으면 뒤처지니까' 이렇게 대답하겠다"고 예시했다. 그는 "제가 누차 강조했던 것처럼 '계급장 떼고 할 말은 하자'는 것이며, 상사의 지시라면 수긍하기 어려워도 분위기를 고려하여 그냥 받아들이던 자세에서 벗어나 이제는 이를 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달라는 부탁"이라고 설명했다.
이 총재는 "간부들은 젊은 직원들이 자유롭게 관행에 도전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후세대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 중요한 책무임을 기억해 주시기 바란다"며 "올해는 중앙은행 본연의 자기다움을 잃지 않으면서도 변화를 선도하는 한은이 되도록 다 같이 노력하자, 저부터 앞장서고,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정선은 기자 bravebambi@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