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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칼럼] 네거티브 금융규제로의 전환

전문가 칼럼

기사입력 : 2022-05-09 06:00 최종수정 : 2022-05-09 09:57

금융규제의 경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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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현기 웰스가이드 대표· 서울대 경제학 박사· 기획예산처 정부개혁실 사무관· 머니투데이 이코노미스트 역임· 에프앤가이드 리서치센터장· 하나금융지주에서 전략기획 총괄· 하나금융경영연구소 대표 역임

배현기 웰스가이드 대표· 서울대 경제학 박사· 기획예산처 정부개혁실 사무관· 머니투데이 이코노미스트 역임· 에프앤가이드 리서치센터장· 하나금융지주에서 전략기획 총괄· 하나금융경영연구소 대표 역임

최근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다시 읽었다. 저자들은 국가의 성공과 실패는 지리, 문화, 지식 등이 아니라 정치·경제제도(institutions)에 달려있다고 주장한다. 한 국가의 정치제도가 경제제도를 결정하고, 이러한 제도에 따라 경제주체의 인센티브와 행동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소수를 위한 배타적(extractive) 제도와 다수를 위한 포괄적(inclusive) 제도가 대비된다. 전자에서는 슘페터가 얘기한 창조적 파괴가 불가능하다. 포괄적 정치제도는 다수의 참여를 끌어내고 포괄적 경제제도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이러한 경제제도에 의해 지지된다. 경쟁, 혁신, 성장의 역동적 선순환이 작동한다.

제도와 인센티브 측면에서 우리나라 금융규제는 배타적인가, 아니면 포괄적인가? 달리 말하면 혁신을 억제하는가, 아니면 조장하는가?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한가지 전제할 것은 정보의 비대칭성 등 금융시장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금융규제는 불가피하며, 특히 금융안정을 위한 건전성규제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얘기하는 금융규제는 경쟁 관점의 영업규제이다. 포지티브와 네거티브 시스템이 그것이다. 통상 열거주의와 포괄주의로 번역된다. 전자는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정해주는 것이고, 후자는 따로 금지하지 않으면 자유롭게 영업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우리나라의 금융규제는 열거주의이다. 일단 금융업, 즉 무엇을 하는지를 정의한다. 은행업, 금융투자업(투자매매업, 투자중개업, 집합투자업, 투자자문업, 투자일임업, 신탁업), 보험업(생명보험업, 손해보험업, 제3보험업), 여신전문금융업(신용카드업, 시설대여업, 할부금융업, 신기술사업금융업), 대부업 등이 그것이다.

또한, 전업주의를 기본으로 서로 다른 업종을 동시에 영위할 수 없다. 예외적인 경우에만 내부 겸영이 가능하다. 카드업과 신탁업의 겸영 또는 보험판매, 펀드판매 등 금융상품의 유통과 관련된 경우이다. 물론 다른 금융업종의 자회사룰 둔다든지, 금융지주회사를 통해 겸업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 다음은 누가 하는가이다. 허가, 등록, 신고 등으로 나뉘지만 기본적으로 아무나 할 수 없다.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는 4%(10%)로 제한되며, 제한이 없어도 대주주 적격성에 문제가 있으면 안 된다. 인터넷전문은행의 경우에는 산업자본이라 해도 34%까지 주식을 보유할 수 있는 특례를 부여하기도 한다.

어떻게 하는지도 정해준다. 금융상품의 구성, 가격과 수량, 전달 방법까지 규정한다. 금융소비자 보호, 개인정보 보호, 자산건전성, 자본적정성 등의 여러 가지 가치와 기준들이 적용된다. 글로벌 스탠다드를 따른 것도 있고, 국내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반영한 것들도 있다.

이러한 열거주의는 혁신을 저해할 수밖에 없다. 금융혁신이란 새로운 금융업의 제공 또는 새로운 금융상품 제조·공급 방식에 의한 비용 절감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법규에 의해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가 정해진 국가에서는 법규가 바뀌기 전까지는 혁신이 불가능하다. 새로운 뭔가를 할 수 있는 누구도 등장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포괄주의 금융규제 국가들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기존 법규가 금지하는 것들이 아니라면 새로운 금융수요에 맞추어 또는 새로운 방식을 적용한 금융서비스가 자유롭게 등장한다. 신규 공급자들끼리, 그리고 기존 공급자들과 치열하게 경쟁한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당국이 사후적으로 개입한다.

최근의 금융혁신을 주도하는 핀테크 유니콘 기업들의 분포를 살펴보자. 영국 금융·기술·기업가정신센터(CFTE)의 자료에 따르면, 2022년 1월 현재 전 세계 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핀테크는 262개에 달한다. 국적별로는 미국(114), 영국(24), 인도(19), 중국(13), 브라질(9), 독일(8), 프랑스(8), 이스라엘(7) 등의 순서이다.

규제 영향으로 인해 중국이 상대적으로 퇴조했고 2021년에 유니콘에 새로 합류한 핀테크 113개 중에 54개가 미국, 12개가 영국, 11개가 인도 국적이었다. 금융혁신이 활발한 나라들의 공통점은 포괄주의 금융규제 국가라는 점이다. 성공사례가 축적되고 혁신 생태계가 확장하면서 국가별 차이는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다소 어둡다. CFTE 기준 핀테크 유니콘은 비바리퍼블리카(토스), 두나무 등 2개에 불과하다. 핀테크지원센터의 2020 편람에 따르면 국내 핀테크는 484개에 달한다. 송금, P2P, 크라우드펀딩, 가상자산 교환·중개, 인슈어테크, 개인자산관리, RA, RPA, 블록체인, 빅데이터 등 다양하지만 성공 사례는 드물다. 이마저도 금융당국이 열거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한 결과이다. 오픈뱅킹의 확산, 금융혁신법 제정과 규제샌드박스 지정, 신정법의 개정과 금융마이데이터 및 오픈파이낸스의 도입, 온라인투자연계금융업법 제정과 P2P의 제도화 등이 그것이다. 금융소비자법의 제정도 업권별 규제를 넘어서는 하나의 진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거주의는 엄연한 금융혁신의 벽이다. 기존 금융업을 영위하기 위한 허가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고, 등록도 지난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신규 서비스나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당국의 유권해석을 받거나 심사를 통해 샌드박스로 지정받아야 한다. 별 문제가 없어도 제도화까지는 먼 길을 가야 한다.

가상자산과 관련한 제도는 언제 정비될지 모른다. 국외에서는 이미 선수들이 뛰고 있는데, 우리는 관련 법규가 없어서 안달이다. 제도화를 한다고 해도 복잡한 현실을 모두 반영하거나 급변하는 미래를 미리 예상해서 사전적으로 규제하기 어렵다. 제·개정의 무한 반복이다. 언제까지 이런 일을 되풀이해야 하는가.

열거주의의 이면에는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의 결핍도 자리하고 있다. 사업자의 탐욕을 사전적으로 제어하지 않으면, 금융사고와 시장실패로 이어질 것이라는 불안감이다. 하지만 이러한 불안으로 인해 일일이 열거해서 규제하면 혁신은 일어나지 않는다. 원칙을 세우고, 지키지 않을 경우 강력히 처벌하면, 규율은 저절로 잡힌다.

[서울국제금융오피스와 함께하는 금융 전문가 칼럼⑤ - 배현기 웰스가이드 대표]

배현기 웰스가이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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