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신용평가 시장에서 M&A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외국계 신용평가사가 경영권을 인수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국내 평가시장의 잠식이냐 선진화냐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한국기업평가가 외국계 신용평가사에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향후 신용평가 시장에서 국내 신용평가사 입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한국기업평가는 피치에게 지난달 17일 49.68%(225만5684주) 주식을 매도하면서 경영권도 넘기게 됐다.
기존 최대주주였던 한일시멘트는 한기평 주식을 주당 1만5000원에 사서 경영권 프리미엄을 붙여 피치에게 3만원에 넘겨 이익을 봤다. 피치는 2002년 11월부터 한기평의 주식 7.42%(35만9688주)를 보유하고 있었다. 피치는 이달부터 한기평에 대한 본격적인 실사를 시작하며 무리가 없는 이상 이달 안에 계약을 마무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 국내 기업평가 기준 혼란 우려
국내 신용평가 시장은 한국신용정보(이하 한신정), 한국기업평가(이하 한기평), 한국신용평가(이하 한신평) 등 3사가 삼분하고 있으며 서울신용평가정보가 일부 점유율을 차지하면서 국내 업체 위주로 형성돼 있었다.
하지만 지난 2004년 무디스가 한신평의 지분을 50%+1주, 한신평정이 49% 주식을 보유하게 됨에 따라 경영권이 무디스로 넘어갔다.
이후 올해 한기평까지 피치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신용평가사 주요 3사중 한신정 한 곳만 경영권이 외국계 신용평가사로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한신정마저도 스탠더드앤푸어스에 경영권을 넘기는 것이 수순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면서 외국계 평가 시스템으로 국내 평가 시장이 잠식돼 국내 경제가 외국계 신용평가사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업계 한 관계자는 “국내 신용평가 시장은 지금까지 우리나라 신용평가사들이 기반을 닦아와 현실이 잘 반영된 평가가 이뤄졌는데 외국계 시스템이 들어와 기업의 평가가 전체적으로 절하될 수도 있다”며 “이는 우리나라 기업 전체에 대한 평가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 글로벌과 로컬 평가는 다르다
일부 업계 관계자들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글로벌 신용평가 시스템과 국가별 특성을 살린 로컬 신용평가 시스템과 차이가 있기 때문에 외국계 신평사들이 국내 시장에 지분참여 방식을 통한 경영권 인수는 시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오히려 우리나라 시장의 평가 특성을 살리면서 국내 경제 및 기업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긍정적 평가도 나왔다.
한기평 관계자는 “국민은행의 최대주주가 외국계 회사가 됐다고 국민은행이 외국계 은행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한기평의 최대주주가 외국계 신용평가사가 됐다고 외국계 신용평가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며 “오히려 인력과 비용에 있어 글로벌 스탠다드로 선진 시스템을 적용해 국내 평가 시스템은 더욱 안정화 될 것이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미 2004년 무디스로 경영권이 넘어간 한신평의 경우 기존 평가 방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국내 인력에 대해 글로벌 기준에 맞춘 교육을 제공하고 국내 기업의 글로벌 평가까지 일부 인력이 참여해 도움을 주고 있다.
한신평 김선대 전무는 “무디스가 경영권을 가지고 있지만 기존의 등급정책과 수준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과거와 특별하게 달라진 변화는 없다”면서 “하지만 정기적으로 인력에 대한 교류를 꾸준히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기업이 무디스를 통해 글로벌 신용평가를 받을 때 한신평 인력이 참관자 형식으로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기평의 경우 단순 자본 이익을 염두에 두고 주식을 매수 한 것이 아니라 피치의 우리나라 사업확대라는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경영의 차이가 나타날 것이라고 업계에서는 지적하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상황을 두고 봐야 하겠지만 피치가 한기평의 최대 주주로 등극한 것은 경영권 확보를 통해 국내 시장에서 입지를 확대하려는 의도가 크다”며 “피치의 네임밸류가 있기 때문에 단순한 자본 이익에 그칠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 세계적 금융시장돼야 글로벌 평가사도…
한편 한신정도 스탠다드앤드푸어스에 넘어 갈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 한신정은 과거 이미 이야기가 나왔었고 M&A가 결렬이 된 적이 있어 고려하지는 않고 있다고 밝혔다.
한신정 관계자는 “과거 이미 M&A관련 협상이 진행되다가 깨진 바가 있어 또 다시 이뤄지기는 힘들다”며 “또한 외국계 신용평가사와 M&A의 경우 경영권이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고려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또 지금 최대주주가 개인인 관계로 이익에 따라 M&A가 진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이 관계자는 “물론 개인 이익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이익에 따라 달라졌을 것이라면 벌써 다른 곳으로 넘어갔을 것이다”며 “지금의 시스템은 최대주주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고 이에 따라 한신정은 나름대로 특성을 살려 열심히 자리매김을 한다는 방침이다”고 말했다.
이로써 규모있는 외국계 신평사로 경영권이 넘어가지 않은 신평사가 한 곳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중장기적으로 글로벌 신평사와 견줄만한 국내 신평사가 나와야 하지 않느냐란 문제점도 지적됐다. 하지만 이에 대해 아무리 국내 신평사가 국제적으로 인지도를 얻으려 해도 시장이 형성되지 않아 어려운 상황이라는 반론도 나왔다.
업계 한 전문가는 “지금까지 국내 시장은 정책적으로 보호돼 왔고 그만큼 성장했다”며 “하지만 실제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조차 우리나라 신용평가사의 평가를 받는 곳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고 말했다.
또 이 관계자는 “금융시장이 이미 세계적으로 성장한 일본의 경우 정책적으로 국제적 신평사를 육성에 나서는 것이 가능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무조건적인 보호를 통한 육성보다 국내 시장을 세계적인 금융시장으로 만드는 것이 선행돼야한다”고 말했다.
고재인 기자 kji@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