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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액 숨기고 ‘오리발’ 채무자 부지기수
빚 못 갚는 선량한 채무자 보면 가슴아파
평소와 다름없는 오전 8시 고려신용정보 채권관리팀 김형균 팀장은 사무실에 출근해 책상에 쌓아둔 파일과 수첩을 펼친다.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어가며 꼼꼼히 ‘금일계획’을 수첩에 적는가 싶더니 그의 왼손이 바쁘게 수첩과 전화기 사이를 오간다. 오늘 변제금을 입금하기로 한 채무자에게 거는 재확인 전화와 면담 약속을 한 채무자들과의 확인전화다.
하루 평균 통화량 40통, 평균 면담 3건 이외에도 수시로 있는 실사와 집행 등 모두 채권추심원인 김 팀장이 해야할 일이다.
요새같이 ‘물량’이 많은 때는 하루 24시간이 모자란다. 다른 사무실처럼 커피 한 잔과 동료와의 가벼운 잡담을 나누는 등의 여유를 부릴 틈이 없다. 성과에 따라 급여를 받는 채권추심원들에게 추심업무를 할 수 있는 시간이 곧 돈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해결사가 아니다
폭력과 협박 등으로 빚진 돈을 대신 받아내는 해결사. 채권추심원의 이미지가 이렇게 굳어진 것은 실제로 과거에는 조직폭력배들이 채권추심을 했기 때문이다.
김 팀장은 “지금도 거리를 지나다보면 ‘꿔준 돈 대신 받아드립니다’라는 문구와 핸드폰 번호 하나가 기록된 광고물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며 “이들은 대부분 대포 핸드폰을 가지고 영업을 하는 전문 해결사들로 돈을 받아냈다 하더라도 채권자에게 순순히 돌려주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합법적으로 채권추심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신용정보회사에 고용된 직원이다. 특별한 자격증은 필요하지 않지만 무분별한 카드발급으로 인해 가계대출이 늘어나면서 ‘받을 돈’이 많아진 세상에서 채권추심원은 번듯한 전문직으로 대접받고 있다.
이들은 성과에 따라 급여를 받는데 법률상으로 추심업을 맡은 신용정보사가 일반 채권은 채권금액의 20% 특수채권은 30%의 수수료를 받게 된다. 이 때 받은 수수료의 40%를 담당 추심원의 성과급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특수채권이란 대개 1년 이상 된 채권 혹은 받기 어려운 채권으로 신용정보회사와 채권자가 계약을 할 당시 특수채권인지 일반채권인지를 판단 계약하게 된다.
이렇듯 개인의 성과에 따라 억대의 연봉을 받는 추심원부터 연봉이 2000만원이 안되는 추심원까지 개인의 능력에 따라 연봉이 천차만별이다.
현재 LG 삼성 등 대형 카드사들은 대략 1000명 이상의 채권추심원을 두고 있고, 순수민간투자 추심업체만 9개사에 이른다.
김 팀장은 “우린 법의 테두리 안에서 채권자의 대리인으로서 돈을 받아 주는 사람이지 해결사가 아니다”라며 “채무자는 물론 채권자들 중에도 소재파악도 안되는 채무자를 찾아 2~3일 안에 돈을 받아달라는 등 채권추심원을 해결사로 인식해 무리한 요구를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소연했다.
■ 실사·집행 등 빠듯한 일정
김형균 팀장의 수첩에는 확인전화와 3건의 면담 그리고 2건의 실사가 적혀있다. 집행이 없는 오늘 스케줄은 그나마 좀 수월하단다.
실사, 집행 등 생소한 단어를 사용한다는 질문에 김 팀장은 실사는 채무자의 소재와 경제상황을 파악하는 것이고 집행은 개인채무자로부터 압류한 가전제품과 가재도구에 대한 감정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김 팀장은 사무실에서 채권자에게 보고전화와 채무자에게 독촉전화, 입금확인 전화 등을 하고 11시까지 ‘실사’ 장소를 찾아갔다.
보통 주소지에 나와있는 사무실이나 공장을 직접 찾아가 보는 것인데 주소지에 쓰인 대로 공장이 그 자리에 있기만 해도 다행이다. 어떤 때는 사무실이라고 찾아간 곳이 아파트 공사장일 경우도 있고, 주변 사람들을 통한 추적 끝에 실제 주소를 찾아가도 채무자의 행방이 묘연할 경우가 많다.
김 팀장은 집행에 대해 “자발적 변제를 촉구해서 채권이 정리되면 좋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소송을 해서 법에 의해 집행 권한이 주어지면 채무자의 재산을 압류하는 등 강제집행 과정을 밟게 된다”며 “가족과 이웃들 앞에서 가재도구에 압류딱지를 붙여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게 되는 ‘집행’은 채권추심원들이 가장 꺼리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 하루 12시간 근무, 평균 통화량 21통
최근 고려신용정보가 채권추심인 16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추심원 중 18.8%가 8시 이전에, 58.8%가 8시경에 출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무실에 얽매여 있지 않은 직업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다른 직장인들보다 이른 출근시간이다. 또 응답자의 51.3%는 8시 이후에 퇴근하는 것으로 조사돼 하루 근무시간이 12시간을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루 전화통화량은 21통 이상이 45.6%로 가장 많았고 15~20통이 25.6%, 11~15통이 20.0% 순이었다.
한 통화의 평균 시간이 6~10분이 45.6%, 5분이하 33.1%로 나타나 하루에 3시간이 넘는 시간을 전화통화를 하는 셈이다.
직접 만나는 고객수는 하루 평균 3~5명 54.7%, 2명 이하 23.9% 등으로 조사됐으며, 고객을 만날 때 한번에 소요되는 시간은 55.1%가 1시간 이하라고 답했다.
김 팀장은 채권추심업무도 상당한 노동력이 필요한 직업이지 단순히 협박과 폭력으로 돈을 받아내는 직업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채권추심업자가 갖춰야 할 덕목은 첫째 성실함과 부지런함이다. 짜여진 스케줄대로 일을 진행시켜야 추심에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과 같이 다중채무자가 많은 경우는 그 채무자 한 사람에 여러 신용정보사에 의뢰가 들어오게 되므로 가장 부지런하게 움직인 사람에게 성과가 주어지게 된다.
둘째는 정직함이다. 정직해야 채권자나 채무자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고, 일단 신뢰를 얻게 되면 일의 진행이 빨라진다.
셋째는 경기의 흐름과 채무자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는 판단력으로 꾸준한 자기계발을 해야 얻을 수 있다고 김 팀장은 말한다.
■ 근절되지 않는 불법채권추심
그러나 김 팀장이 말한 ‘합법적인’ 채권추심이 있는가 하면 불법채권추심도 근절되지 않고 증가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신고된 불법채권추심 사례는 지난 1월 말 현재 211건으로, 지난해 10월 283건, 11월 224건, 12월 213건 이후 월평균 200건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금감원은 신고된 접수건 외에 실제 더 많은 불법채권추심 사례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카드 사태가 불거진 지난해부터 채권 추심 관련 민원이 폭등, 그 증가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가장 많은 사례가 현관에 ‘형사고발’이나 ‘독촉장’ 같은 문서를 큼지막하게 붙여 놓는 경우, 이것은 어떤 법적 절차에서 나온 서류도 아니며 이웃에게 망신을 줘서 돈을 갚게 하려는 수법이다.
또 돈을 갚지 않을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협박성 어투, 가짜 압류 딱지를 붙이는 행위, 직장이나 주변 친인척에게 알리는 경우 등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사생활 또는 업무의 평온을 해치는 말 또는 음성이 채무자나 채무자의 관계인에게 도달하는 행위는 처벌대상이 된다”고 설명했다.
김형균 팀장은 “채권추심원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불법행위를 일삼는 추심원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답했다.
금감원은 나날이 늘고있는 불법채권추심 행위를 막기 위해 지난 18일 ‘불편·부당 채권추심 신고센터’를 설치, 감독을 강화하고 있다.
■ BJR(배 째라)와 MDR(맘대로 해라)로 무장한 채무자
김 팀장은 채무자를 배째라형, 오리발형, 양치기소년형, 회피형, 읍소형, 노력형 등으로 나눠 설명했다. 배째라형은 재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나 친지 이름으로 은닉하고 무조건 갚을 돈이 없다고 우기는 유형, 이들은 재산을 명의이전, 가등기, 근저당 설정 등 다양한 방식으로 숨겨놓아 채권추심원의 애를 먹인다.
양치기소년형은 “다음 주까지 갚겠다” “한 달 안에 갚겠다”를 연발하며 시간을 끄는 타입. 회피형은 독촉전화를 무조건 피하는 스타일이다. 읍소형의 경우는 실제로 돈이 없는 경우, 이들을 상대할 때 채권추심원들이 가장 안타깝다. 또 노력형은 하루 단위, 일주일 단위로 꼬박꼬박 돈을 갚는 모범 채무자들이다.
김 팀장은 “배드뱅크 설립이 추진되는 사회분위기 때문에 많은 채무자들이 조금만 버티면 채무금액이 탕감될 것이라는 기대로 자발적 변제가 감소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실제로 배드뱅크 설립이 가시화된 후 카드사의 채권 상환 독촉 전화를 아예 회피하거나 배드뱅크로 갈테니 앞으로는 전화를 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연체자들도 나오고 있다.
김 팀장은 “신불자 해소 방안도 좋지만 시간을 끌면 이자탕감 등 더 좋은 조건이 나오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확산돼 문제”라며 “상환 의지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별해서 구제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후 8시. 출근하지 꼬박 12시간만이다. 김 팀장은 출근할 때와 같은 모습으로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여러 파일들과 씨름하고 있다.
또 다시 묵묵히 수첩을 꺼내고 오늘의 경과와 내일 스케줄을 적는 김 팀장. 채권추심 일의 특성상 당장 손에 쥔 성과는 없다.
“오늘과 같은 작업을 몇 달간 지속해야 성과가 나옵니다. 쉽게 돈을 받아낼 수 있다면 누가 채권추심업무를 맡기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김 팀장. 바쁜 내일을 위해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 김형균 팀장은 보고·확인 등의 업무를 40여통의 전화를 통해 한다.
▲ 책꽂이를 빽빽히 채운 채권 파일들
김보경 기자 bkkim@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