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음대를 졸업하고 1977년에 대한민국 최초로 카라얀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3위로 입상한 후 1980년에 국립 교향악단(후에 KBS교향악단으로 전환)의 전임 지휘자가 된 금난새에게는 현실적인 잣대로는 최고의 오케스트라를 그만두고 열악한 지방의 오케스트라로 가는 것이었지만 평소 열악한 지방문화의 개선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금난새는 더 가치 있는 일을 선택하기로 하고 KBS 연봉의 1/3만 받으면서도 수원시향을 맡았다.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국내 최초로 6시간 마라톤연주회를 기획하여 단원들과 치열한 연습 끝에 뜨거운 반응속에 막을 내릴 수 있었다. 평소 2시간 공연에도 40여명에 불과했던 관객이 6시간동안의 연주에서도 1,000명 이상 자리를 지키는 등 세간의 주목을 받아 언론에서도 대서특필하고 기네스북에도 오르는 기록을 세우면서 수원시향은 더 이상 보잘것없는 오케스트라가 아니었다.
보통 오페라는 무대 위 성악가가 주인이고 오케스트라는 무대 아래에서 그들을 빛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수원시향은 성악가들이 무대위에서 빛날 수 있도록 어느때보다 철저하게 연습에 몰두하였다. 성악가가 자주 실수하는 부분까지 미리 파악해 그에 대비한 철저한 연습의 결과 리허설에서 성악가들은 수원시향이 그들을 위해 얼마나 세심하게 배려했는지를 알아보고 몰라보게 달라진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떤 오케스트라도 성악가에게 완벽하게 맞춰서 연주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대에 놓을 가구도 수원의 가구점에서 선뜻 빌려주기로 하여 500만원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무대도 무사히 채울 수 있었다.
오백만원의 지원금으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기적처럼 올려지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오케스트라는 최상의 공연을 펼쳤고, 최고의 성악가들이 들려주는 아리아는 무대를 꽉 채우고도 남았다. 공연 내내 심취해왔던 관객들은 오페라가 끝나기 무섭게 기립박수로 답해주었다.
공연이 끝난 후 금난새는 500만원으로 이 음악회를 어떻게 준비했는지를 관객에게 설명했다. 단원들이 자신에게 돌아갈 지원금을 선뜻 내어놓았다는 사실에 수원시민들은 아낌없는 환호와 박수를 보내주었다.
공연이 끝난 후 수원시장이 초대한 VIP인사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수원시향을 위한 오케스트라 연습실을 지어 주기로 하여 꽤 많은 기금이 모였다. 존폐위기에 처해졌던 수원시향에 이제는 지역 인사들이 앞 다투어 지원하겠다고 나서게 되어 공사비 50억원이 넘는 야외음악당과 100여평의 오케스트라 연습실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결과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는 동반성장 네트워크를 만든것이었다.
참고자료 : 모든 가능성을 지휘하라(금난새 지음)
윤형돈 인맥관리지원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