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5대 은행의 정기예금 잔액이 한 달 만에 30조원 넘게 늘며 800조원에 육박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고강도 긴축 기조에 국내 증시가 얼어붙은 반면 예·적금 등 은행 수신금리는 크게 오르면서 시중 자금이 안전 자산인 예·적금으로 몰리는 ‘역(逆)머니무브’가 가속화하는 모습이다. 급격한 금리 인상에 경기침체 우려가 나오면서 채권시장에서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일부 시중은행에서도 1년 만기 상품 금리가 2년 만기 상품보다 높아졌다.
4일 은행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의 예·적금 잔액은 지난달 29일 기준 797조1181억원으로 8월 말(768조5434억원)에 비해 28조6377억원 증가했다.
이미 시중은행의 정기예금 금리는 연 4%대로 올라선 상황이다. 일부 예금은 4% 후반대 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 같은 역머니무브 현상은 더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미 연준이 올해 들어 3회 연속 '자이언트 스텝(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을 단행하면서 한국은행이 이달 '빅스텝(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을 밟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시중은행 정기예금 중에선 1년 만기 상품 금리가 2·3년 만기 상품 금리보다 더 높아지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이날 기준 우리은행 '원(WON)플러스 예금' 12개월 만기 상품의 금리는 최고 연 4.5%로, 24개월 만기 금리(4.3%)보다 0.2%포인트 높다. 신한은행 '쏠편한 정기예금'도 12개월 만기 금리(4.35%)가 24개월 만기(4.2%)보다 0.15%포인트 앞섰다. 하나은행 '하나의 정기예금' 역시 12개월 만기 금리가 4.15%, 24개월 만기 금리가 4%다.
일반적으로 만기가 긴 상품의 경우 만기가 짧은 상품보다 더 높은 금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향후 경기침체 우려가 반영되면서 만기가 짧은 상품이 더 높은 금리를 제공하는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이 시중은행 예금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채권시장에선 이미 단기금리가 장기금리를 뛰어넘는 역전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이날 서울 채권시장에서 국고채 3년물 금리는 전 거래일보다 0.105%포인트 내린 연 4.081%로, 10년물은 0.09%포인트 하락한 연 4.006%로 거래를 마쳤다. 앞서 우리나라에서 장단기 금리 역전이 나타난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던 2007년 11월~2008년 1월 사이 총 37일, 2008년 7월 총 10일로 두 차례뿐이다. 연준의 고강도 긴축과 경기둔화 우려가 맞물리면서 미국의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도 이어지는 중이다. 3일(현지 시간) 뉴욕 채권시장에서 미 국채 10년물 금리는 전 거래일 대비 4.87% 폭락한 3.625%에, 통화정책에 민감한 2년물 금리는 3.37% 하락한 4.092%에 거래됐다.
단기 상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점도 상대적으로 만기가 짧은 예금 금리를 밀어 올리는 요인이다. 가파른 금리 상승세에 높은 이자를 찾으면서도 만기는 짧게 가져가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은행들은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해당 상품의 금리를 높여 고객 자금 유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전문가들은 채권시장 장단기 금리 역전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김성수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한미 모두 추가적인 긴축 스탠스가 강화됐지만 경기는 공히 둔화 국면에 진입했다”며 “국고채 주요 스프레드 역전은 상당 기간 이어질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한아란 기자 aran@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