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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은 지난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장에서 ‘신경영’을 선언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200여 명의 삼성 임원진을 불러 모아 체질 변화를 주문한 것이다.
신경영 선언의 결정적 계기는 ‘세탁기 사건’이었다. 당시 생산라인 직원들이 세탁기 뚜껑 여닫이 부분이 맞지 않자 즉석에서 칼로 2mm를 깎아 조립한 사건이다.
이러한 내용이 담긴 내부고발 비디오를 본 이 회장은 “회사가 썩었다. 완전히 썩었다”라며 “삼성은 이제 양 위주의 의식, 체질, 제도, 관행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라며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고 주문했다.
판매량이 아닌 질적 성장을 강조한 것이다. 실제로 1993년 삼성전자의 불량률은 전년도보다 적게는 30%, 많게는 50%까지 줄이는 성과를 거뒀다.
재계에선 '신경영 선언'이 삼성을 글로벌 1등 기업으로의 성장시킨 시작점이라고 평가한다.
신경영 선언 29주년인 오늘 이 부회장은 네덜란드·영국·독일 등 유럽 지역 출장길에 나선다. 오는 18일까지 12일간의 일정이다. 이번 출장은 지난해 12월 중동 방문 이후 6개월 만이다. 그는 이번 출장을 위해 두 차례의 재판 일정도 미뤘다.
이 부회장은 이번 출장길에서 유럽 각국을 방문해 반도체를 중심으로 유럽의 파트너사들과 사업 협력 강화를 논의할 예정이다. 2019년 선언한 ‘시스템반도체 비전 2030’ 달성에 속도를 내기 위함이다.
이 부회장은 지난 2019년 “메모리에 이어서 파운드리를 포함한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도 확실히 1등을 하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시스템반도체 1위는 이 부회장이 언급한 ‘승어부(勝於父·아버지를 능가하는 것)’와도 연결된다.
이 부회장은 삼성을 메모리 1위 기업으로 만들어 낸 부친의 업적을 능가하는 경영 환경을 실현하고 싶지만, 현재 반도체 패권 경쟁 T심화, 코로나 확산, 재판 등 이 부회장 및 삼성을 둘러싼 사업 환경이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20년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위치한 ASML 본사를 찾아 EUV 장비를 살펴보고 있다. (왼쪽부터) ASML 관계자 2명, 김기남 삼성전자 DS부문장 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마틴 반 덴 브링크 ASML CTO/사진=삼성전자
이미지 확대보기EUV 노광장비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ASML이 생산하고 있다. 첨단 미세공정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선 EUV 장비가 필수적이다.
ASML은 연간 약 40대의 기계를 생산하지만, 최근에는 반도체 부족으로 기계 생산이 어려울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반면 장비 수요는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ASML이 ‘슈퍼을(乙)’이라 불리는 이유다.
지난해 파운드리 재진출을 선언하며 삼성전자와 파운드리 시장에서 경쟁하게 된 인텔도 최근 겔싱어 최고경영자(CEO) 주도로 첨단 미세공정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독점 계약했다. 2024년까지 5대를 독점적으로 공급 받게 된다.
겔싱어 인텔 CEO는 “장비 확보가 반도체 생산능력 확대에 가장 중요한 과제”라며 피터 베닝크 ASML CEO에 직접 전화를 걸어 지원을 요청했다.
삼성전자도 지난 2012년 ASML에 전략적 지분 투자를 단행한 이후 파트너십을 쌓아왔다. 특히 이 부회장은 지난 2020년에도 피터 베닝크 ASML CEO와 만나 EUV 장비 공급 등을 논의한 바 있다.
또 영국 케임브리지에 있는 삼성 AI 연구센터 등 산하 연구 기관 및 생산 시설을 방문해 임직원을 격려할 것으로 보인다.
재계에선 이 부회장이 이번 유럽 출장에서 지난 2016년 이후 6년간 끊긴 대형 M&A를 구체화할 것이란 기대감도 나온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컨퍼런스콜을 통해 “향후 3년간 의미 있는 M&A를 진행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한종희닫기

그간 업계에선 삼성전자의 M&A 대상으로 차량용 반도체 기업인 네덜란드 NXP와 독일 인피니온 등이 거론됐다. 이들 모두 유럽에 본사를 두고 있다. 또 글로벌 M&A 시장에서 뜨거운 매물인 반도체 설계(팹리스) 기업 영국 ARM도 인수 대상 물망에 올랐다.
ARM의 반도체 설계 기술은 삼성전자, 애플, 퀄컴 등 여러 시스템반도체 기업에서 활용되고 있다. 2015년 일본 소프트뱅크가 인수했는데, 지난해 미국 반도체 기업인 엔비디아가 인수를 추진했지만, 독점금지 규제 등 각국 정부로부터 심사를 통과하지 못해 인수가 불발됐다.
ARM이 다시 매물로 나오자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ARM 인수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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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싱어 인텔 CEO도 최근 인터뷰를 통해 “ARM 인수합병을 추진하는 컨소시엄이 등장한다면 어느 정도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업계에선 최근 이 부회장과 겔싱어 CEO가 회동을 가진 만큼, 삼성전자와 인텔 등 글로벌 기업들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인수를 추진할 가능성도 크다고 보고 있다.
정은경 기자 ek7869@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