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플라시도 도밍고 인스타그램
어느 한가한 오전, 출연자 대기실에서 느긋하게 연습을 하다 잠시 바람을 쐬고 돌아왔는데 그 자리에서 웬 테너가 발성 연습을 하고 있었다. 가방이며 악보며 그대로 다 놔두고 다녀왔는데 허락도 없이 들어왔다니,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멈칫했다.
어디선가 많이 듣던 목소리! ‘오페라의 황제’ 플라시도 도밍고였다.
반시간 남짓 지났을까, 드디어 문이 열리고 도밍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코앞에 멍하니 서있는 안우성에게 도밍고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선뜻 악수를 청했다. 충분히 스토커로 오해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극장에는 동양인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젊은 아시아청년의 염탐 혹은 도청에 불쾌할 수도 있었다.
“구텐 탁! 난 플라시도 도밍고네. 나에게 무슨 용건이 있어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예상치 않게 도밍고는 반가움을 표시하며 성이 아닌 이름으로 친근하게 자기를 소개했다. 안우성은 정중하게 사과를 먼저 하고 극장에 새로 온 바리톤이라고 인사를 했다. 도밍고는 안우성에게 어디서 공부를 했는지, 나이는 몇 살인지 이번 시즌에는 어떤 오페라를 하는지 이것저것 물었다. 안우성은 대가와의 황금 같은 시간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마에스트로! 실례가 안 된다면 당신 앞에서 노래를 불러보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한번 불러보겠나? 이번엔 내가 노래 중간에 좀 끊어도 괜찮겠지? 시작해보게”
그가 노래하는 동안에 도밍고는 중간중간 두어 번 손가락으로 미세하게 안우성의 턱을 살짝 누르거나 어깨의 자세를 미세하게 교정해주었다. 도밍고와의 짧았던 교감 이후로 작은 변화가 느껴졌다. 평소에 어려워했던 부분이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나오는 게 아닌가? 두 곡의 아리아를 끝까지 불렀을 때 도밍고는 말을 이어갔다.
“내가 알고 있는 발성의 비밀을 하나 알려주겠네.” 그리고는 코 주변에 동그란 원을 그려 보였다. “여기까지 너무 멀리 산책 나가지 말게, ’포커싱’ 그게 전부네.”
도밍고는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오게 되면 자신이 극장장으로 있는 오페라 하우스로 찾아오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아마 그때는 시간을 좀 더 내줄 수 있을 거라면서.
높은 경지에 오른 음악가들은 엘레강스하다. 그런 면 때문에 대부분 고상해 보이는 한편 도도하거나 차가운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안우성이 만난 ‘오페라의 황제’ 플라시도 도밍고는 우아함은 물론 친절함의 황제였다. 항상 먼저 다가와 손을 내어주고 말을 걸어줄 때면 그 기품이 더 높아지는 것 같았다.
‘한 세기를 풍미한 불세출의 테너를 있게 한 마성의 근본은 극도의 친절함에 있는 게 아닐까” 안우성은 도밍고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친절의 기억은 오래 남는다. 친절은 누구에게나 베풀 수 있는 미덕이자 최고의 매너다.
인용자료: 남자의 클래식 (안우성 지음)
윤형돈 FT인맥관리지원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