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는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 그룹을 이끌어 온 전문경영인 출신 부회장들이 전면에서 물러나는 파격적 세대교체 인사를 단행했다.
이어 주요 계열사 CEO를 교체하거나 새롭게 선임했다. 새로운 CEO를 맞이한 계열사는 SK㈜, SK실트론, SK머티리얼즈, SK이노베이션, SK온, SK에너지, SK인천석유화학, SK엔무브,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 SK넥실리스 등 10개에 이른다. 새 수장 10명 가운데 7명은 SK㈜에서 투자 관련 업무를 맡았던 경험이 있다.
SK이노베이션을 맡게 된 박상규 총괄사장 전문 분야가 포트폴리오 효율화다. 1964년생 박 총괄사장은 SK이노베이션, SK에너지, SK㈜ 투자센터 전신인 투자회사관리실 등을 거쳐 2011년 비서실장으로 발탁돼 최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CEO로서 경력은 풍부하다.
2017년부터 SK네트웍스를 이끌다 지난해 SK엔무브 대표로 선임됐다. 두 회사는 사업 정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특히 윤활유 사업을 맡고 있는 SK엔무브는 한때 매각까지 추진했으나, 전기차·데이터센터 등 사업다각화로 돌파구를 찾았다.
박 총괄사장과 마찬가지로 1964년생인 장용호 사장은 ‘투자형 지주사’를 표방하는 SK㈜를 이끌게 됐다. 장 사장은 첨단투자센터 전신인 PM(포트폴리오 매니지먼트)2부문장을 거쳐 SK머티리얼즈와 SK실트론 사장을 지냈다.
이와 함께 SK㈜는 SK수펙스추구협의회 투자 조직을 이관 받는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수펙스추구협의회는 형식적으로 임원과 조직이 SK㈜ 소속이지만 사실상 별도로 활동한다. ESG(환경·사회·거버넌스) 등 그룹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계열사 ESG 신사업 진출, 인수·합병(M&A) 등을 총괄하는 그룹 컨트롤타워다.
반면 SK㈜ 투자 조직은 계열사와 시너지가 있는 기업에 투자하거나 비효율 사업을 정리하는 등 역할에 집중했다.
이번 조직개편으로 SK가 공격적 투자를 통한 사업 확장을 자제하고 투자 관리와 효율화 등에 더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SK㈜도 조직개편 방향에 대해 “글로벌 경영환경 변화에 대응해 투자 기능을 효율화하고 기업 가치를 높이기 위해 포트폴리오 관리 역량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 회장도 올해 신년사에서 ‘해현경장(解弦更張)’이라는 고사성어를 언급했다. 느슨해진 거문고 줄을 고쳐 맨다는 의미로, 도약을 위한 전면적 재점검이 필요하다는 주문이다. 장기적 경영 목표를 전하던 과거 신년사와는 결이 사뭇 다르다.
SK는 적극적 M&A로 몸집을 키워온 기업이다. 2대 최종현 회장 시절 대한석유공사(현 SK이노베이션)를, 3대 최태원 회장이 한국이동통신(SK텔레콤)과 하이닉스(SK하이닉스)를 인수했다. 현재도 SK 본체라고 할 수 있는 3대 계열사다.
이런 SK가 숨 고르기 경영에 나서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성이 강한 거대 기업이 모인 SK는 계열사별 문화와 의사결정을 최대한 존중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지주사 SK가 SK이노베이션 등 주로 에너지 계열사를 관할하지만, SK텔레콤 등 IT계열사에는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최태원 회장 사촌 동생 최창원 부회장이 이끄는 SK디스커버리와 그 계열사도 사실상 독립경영을 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계열사별로 성과를 내기 위한 경쟁적 투자와 이에 따른 중복 투자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연말 인사에 앞서 최 회장은 그간 SK가 단행한 투자와 관련해 경영진을 질책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지난해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CEO 세미나에서 “SK가 여러 곳에 투자하고 있는데 투자 시스템이 잘 작동하는지 철저히 검증하라”며 “제대로 된 투자인지 신중하게 검토하고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최 회장이 지적한 투자 사례는 SK하이닉스 인텔 중국 낸드플래시 사업부(현 솔리다임) 인수가 꼽힌다. D램으로 치우친 사업구조 개선을 위해 2021년 12월 11조원 가량을 들여 전격 인수했지만, 이후 이어진 미국의 중국 반도체 제재 등으로 경영 불확실성이 커졌다.
최 회장은 지난달 SK하이닉스를 방문해 “사업구조 말고도 시장 내 역학관계 변화부터 지정학에 이르는 다양한 요소를 감안해 유연하게 대응해달라”고 재차 강조했다.
이커머스 11번가도 실패한 투자로 평가된다. 2018년 FI(재무적투자자)를 유치할 때만 해도 2조7000억원 규모 기업가치를 인정받았는데, 지금은 그 4분의 1 수준으로 줄었고 경영권도 놓은 상태다. 이밖에 미래 가치를 보고 뛰어든 수소, 소형모듈원자로, 베트남 관련 사업 등도 아직 성과가 미진하다.
곽호룡 한국금융신문 기자 horr@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