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식소장- 농협금융지주 NH금융연구소 소장- 서민금융진흥원 ESG경영위원회 위원
살충제, 제초제를 발명한 화학자는 반세기 이상을 중세 연금술사와 같은 칭송을 받았다. 20세기 중반, 미국에서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병해충 방제에 열을 올렸다. 유럽과 아시아에서 건너온 외래 곤충은 생태계를 교란하였고, 사람들에게 어떤 피해가 있는지 불문하고 다량의 살충제를 살포하였다. 심지어 1950년대 중서부 지역에서는 왜콩풍뎅이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비행기를 이용하여 유독성이 강한 살충제를 마구 뿌려댔다. 실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인체에 해가 없다는 정부 발표만을 믿고 일상생활을 하였다. 많은 동물과 사람들이 고통을 호소하였고 언제부턴가 새들의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침묵의 봄’이 찾아왔고, 돈을 아끼기 위해 가장 저급한 살충제를 다량 살포했다는 조사 결과는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2020년 가을 개봉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90년대 초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대기업에 다니는 재기발랄한 3명의 단짝은 30년 전 회사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고졸이라는 학력 차별에 막혀 자기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모습,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 회사와 조직을 보호한다는 미명(美名)에 양심마저 숨겨야 하는 직장인의 비애가 녹아 있다. 비 오면 시커먼 유독성 화학물질이 포함된 폐수를 흘려보내는 커다란 하수구는 지금도 볼 수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피해자들을 고려하지 않고 진실을 숨기려는 작태다. 오염물질에 노출되어 당하는 고통은 대를 잇는다. 지금은 그러한 모습이 사라졌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 영화는 기업의 지속가능경영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기업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환경을 보전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경영이 중요하다. 이를 실천하기 위한 지배구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지속가능경영, 기업의 사회적 책임, 사회공헌, 윤리경영 등 다른 듯 유사한 듯한 용어가 환경·사회·지배구조 즉, ESG(Environment, Social, Government)로 수렴하고 있다. ESG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존재감을 빠르게 키웠고, 기업의 ESG 경영이 최대의 화두가 되었다.
ESG가 갑자기 출현한 것은 아니다. 1962년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이 쓴 『침묵의 봄』은 많은 이로 하여금 환경문제를 인식하게 하였고, 1972년 로마클럽은 「성장의 한계」 보고서에서 지구 환경문제를 논하였다. 이 보고서는 환경에 관한 관심과 논의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그해 유엔은 인류의 미래에 관한 인간환경회의(UNCHE)를 개최하여 인간환경선언(스톡홀름선언)을 선포하였다. 또한, 환경문제를 전담하는 유엔환경계획(UNEP)도 발족시켰다. 1987년 UNEP 산하의 세계환경개발위원회가 발간한 「우리 공동의 미래」 보고서에서 ESG와 관련이 깊은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지속가능한 발전은 미래세대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잠재력의 훼손 없이 현재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1988년에는 유엔 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도 설립되었다.
1992년 리우 회의에서는 환경문제 제기와 지속가능발전에 관한 리우선언, 이를 실천하기 위한 「의제 21(Agenda 21)」 채택과 더불어 기후변화협약(UNFCCC), 생물다양성협약(CBD), 사막화방지협약(UNCCD)이 체결되었다. 이러한 UN의 3대 협약은 ESG의 환경(E)과 매우 밀접하다.
특히, 기후변화협약은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해 대기 중의 온실가스의 농도를 안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체결되었으며, 기후변화에 따른 부정적인 영향을 인류의 공통관심사로 규정하면서 온실가스 감축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 협약은 1994년 3월에 발효되었으며, 1995년부터 최고의사결정기구인 당사국 총회(COP)가 매년 개최되고 있다. 기후변화협약으로 온실가스 감축에 관한 컨센서스는 이루어졌지만, 얼마나 감축해야 하는지 등의 수치화된 목표가 없어 실효성이 떨어졌다. 그래서 1997년 교토의정서가 채택되었고, 2015년 파리협정이 체결되었다. 파리협정으로 선진국에만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부과하던 교토의정서 체제를 넘어 모든 국가가 온실가스 감축에 참여하는 보편적인 체제가 마련되었다. 파리협정은 지구온난화를 제한하기 위해 산업화 이전 대비 2℃, 가급적 1.5℃ 이하로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사회(S)와 관련해서는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1948년 「UN 세계인권선언」은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에 대해 역설하였고, 1976년에 발표된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에서는 국제 투자와 관련하여 지속가능한 개발, 인권, 고용, 노동, 보건 환경 등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1998년 국제노동기구(ILO)는 「노동자 기본권 선언」을 통해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금지, 차별금지, 아동노동 금지 등의 협약을 채택하였다. 2000년에는 기업, 시민단체 등이 유엔에 모여 인권, 노동, 환경, 반부패 분야의 10대 원칙을 기업경영에 내재화시켜 지속가능성과 기업 시민의식 향상에 동참하겠다는 선언과 함께 유엔글로벌콤팩트(UNGC)가 결성되었고, UNGC는 그에 관한 연차보고서를 제출토록 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들은 2010년 공표된 ISO26000의 사회적 책임 원칙과 사회적 책임 주제 등과도 그 궤를 같이한다.
어찌 보면 ESG의 각 분야 중 지배구조(G)의 중요성이 가장 크다고 하겠다. 환경(E)이나 사회(S)의 중요성을 역설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허공의 메아리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지배구조와 관련하여, 1997년에 미국 비정부기구인 CERES와 UNEP가 공동 설립한 GRI는 지속가능경영보고서 작성을 위한 글로벌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해관계자 식별과 대응, 지속가능성에 대한 조직의 성과, 지배구조, 윤리경영 등에 관한 내용을 보고서에 담도록 하고 있다. 이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촉매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환경, 사회에 대한 문제점 인식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오랜 기간에 걸쳐 UN과 시민단체, 기업 등이 함께 참여하는 글로벌 이니셔티브로 진화하였으며 이를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한 금융의 역할도 강조되었다. 더구나 2008년 금융위기 직후, 약탈적 대출(Predatory Lending)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만큼 금융사가 제구실을 다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지금은 금융사와 고객 간 정보의 비대칭성을 낮추고 금융소비자 보호를 포함한 공공성을 더 갖추라는 의미로 재현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지속 가능한 발전에 관한 촉진자의 역할도 요구되고 있는데, 사실 이와 관련한 논의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1992년 유엔환경계획(UNEP)과 민간 금융사는 유엔환경계획금융이니셔티브(UNEP FI)를 출범시켰으며, 2006년 뉴욕에 모인 금융사들이 지속가능성을 해치지 않는 기업에 유리한 투자 조건을 제시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유엔책임투자원칙(UN PRI)을 정립하였다. 그렇지만 금융충격에 의한 위기 상황은 수많은 사람을 길거리로 내몰아 양극화를 부추겼기에 그러한 책임을 벗어날 수 없는 금융사들이 약탈자라는 오명을 쓰지 않았다 싶다. 그러다 보니 금융사 특히, 은행이 기업의 지속가능경영에 간여하고 사회적 책임을 실행하는 게 중요해졌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선, UNEP FI 권고에 따른 운영원칙 수립을 해야 한다. 2021년 1월 UNEP FI는 소매금융, 중소기업 여신, 기업금융, 무역금융, 프로젝트금융 등 은행의 핵심 활동이나 상품에 EU 분류체계를 적용하는 사례연구 중심의 보고서를 발간한 바 있다. 이 보고서는 은행이 지속성과 투명성을 갖춤으로써 지속 가능한 금융을 강화하는 데 EU 분류체계가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린워싱(Greenwashing)과 같은 리스크 요인을 완화하여 은행의 신뢰도를 높이고 좋은 평판을 받음으로써 지속 가능한 금융상품에 대한 잠재적인 수요와 사업 기회가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고객의 경제활동이 환경적이고 사회적인 목표에 부합하는지 등을 균일하게 평가하는 기능도 포함하고 있다.
둘째, 금융 포용성 확대다. 위기 상황은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금융의 역할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된다.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한 국제적인 노력은 지속되고 있는데, 2010년 G20 서울 정상회의에서는 개도국의 빈곤과 개발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그들이 자생력을 키울 수 있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그 후속 조치로 금융소외계층 포용 글로벌 파트너십(GPFI)이 설립되었고, 여기서 금융소외계층에 대한 포용적 금융을 실행하고 중소기업 지원 등을 추진하고 있다. 2016년 8월 중국 항저우에서 개최된 정상회의에서는 ‘지속 가능하며 균형적이고 포용적인 성장을 추구한다'라는 내용의 정상 선언문을 채택한 바 있다. 이러한 일련의 논의는 금융사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어들이는 약탈자가 아닌 금융소외계층에 대해 따뜻함도 전해 주는 곳으로 변해야 한다는 인식의 공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포용적 금융은 사회적 약자나 외진 곳에 거주하여 금융 사각지대에 놓인 계층에 대해 금융경제의 주체가 예금, 대출, 지급결제 등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제도적 장치라 하겠다.
셋째, 녹색 분야에 대한 자금지원이다. ‘녹색’의 의미는 저탄소 지향, 기후변화 대응을 포괄하는 개념이며, 지속가능성의 범위 내에 있다. ESG 개념의 정립으로 환경에 관한 관심이 무척 높아졌다. 녹색과 환경이 동일한 선상에 놓이니 녹색금융의 범위도 ESG 투자와 상당 부분이 겹친다. 결국 ESG 금융, 기후금융, 탄소금융 등 여러 용어의 함의는 그리 다르지 않다. 이는 신재생이나 고효율 에너지와 관련한 자산, 프로젝트, 기업 등에 대해서는 금융지원을 강화하고, 녹색 채권발행으로 친환경 사업의 원활한 자본조달과 아울러 관련 기술혁신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세계 최대 연기금 중 하나인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온실가스 과다 배출업종인 석유, 철강, 콘크리트 등의 관련 기업에 대한 투자는 배제하고 녹색 분야에 대한 투자는 늘리고 있다. 이와 함께 기후변화 위기를 자신들이 운용하는 펀드의 잠재적 위험 요소로 판단하고 이를 완화하려는 노력도 병행한다.
지속 가능한 금융이 정착하기 위해서는 금융회사들이 지닌 고유의 리스크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에 따른 리스크까지도 관리해야 한다. 기후리스크는 앞으로 다가올 위험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측정할 수 있는 리스크라고 인식하여 이를 실질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명제는 수사(修辭)에 불과해서는 안된다. 이제 ESG는 기업경영, 금융사의 여신지원 및 투자의 표준이 되고 있으며 글로벌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지속가능성이라 하겠고, 환경, 사회, 다양성, 기업경영, 금융시장 등 폭넓은 분야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노력, 제도, 정책, 전략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코로나가 창궐하여 세계가 멈춰 버린 2020년 봄을 기억한다. 어린 시절에 황사만 없으면 볼 수 있었던 바로 그 청명한 하늘이다. 인도의 타지마할이 선명하게 보이는 게 신기할 정도였고 베이징의 파란 하늘은 새삼스럽다. 오죽하면 코로나가 지구에 백신이라는 말까지 성행했을까.
[서울국제금융오피스와 함께하는 금융 전문가 칼럼⑥ - 이우식 농협금융지주 NH금융연구소장]
이우식 농협금융지주 NH금융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