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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민 칼럼) 강남 讚歌 (중)

장태민

기사입력 : 2018-11-22 09:59 최종수정 : 2018-11-22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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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서울 삼성동에 위치한 무역센터

사진=서울 삼성동에 위치한 무역센터

[한국금융신문 장태민 기자] ▲ 잠실

1986년에 열린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에 개최된 서울 올림픽은 강남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사실 서울은 1970년 아시안게임 개최지로 확정됐지만, 대회를 치를 능력이 안 돼 태국 방콕에 개최권을 반납한 적이 있었다.

국제 스포츠 대회와 함께 잠실이 떴다. 잠실(蠶室)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 누에를 키우던 섬이었다. 한강이 송파 쪽으로 흐르면서 신천강과 송파강이 갈라져 360만평에 달하는 큰 섬인 잠실섬이 생겨났던 것이다.

하지만 1971년 한강 개발 사업으로 뽕밭이던 잠실에 변화가 시작했다. 잠실 물막이 공사는 서울시 허가도 받지 않고 시작됐으며 물막이 공사가 끝난 뒤엔 매립에 필요한 토사가 부족해 연탄재를 쏟아 부어야 했다.

아시안 게임을 치러낼 인프라도 갖추지 못한 그 때 대통령 박정희는 대대적인 잠실 개발계획을 내놓는다. 약 340만평에 달하는 땅에 5개 단지규모의 아파트와 잠실종합운동장을 만드는 잠실지구종합개발계획 사업이 추진된 것이다.

이 일대는 1975년부터 서울시 개발촉진지구로 지정됐으며, 아파트 단지도 대거 들어섰다. 대한주택공사는 1970년대 중반 1만 가구가 넘는 잠실주공아파트 제1~5단지를 완공했다. 특히 5단지는 아파트 단지 내에 수영장과 헬스장을 갖춰 차원이 다른 단지가 됐다.

1970년대 후반엔 지하철 2호선 공사 과정에서 구의에서 잠실로 가는 단거리 노선을 포기하고 강변과 잠실나루를 거치게 해 ‘아파트 단지들’을 배려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강남지역은 잠실의 넉넉한 부지한 함께 급성장을 이루게 된다.

지하철 2호선이 완전히 개통된 1985년엔 서울 인구 964만명 중 강남 인구가 442만명에 달할 정도로 강남은 급성장해 있었다. 무역센터와 인터콘티넨털 호텔 등 고층 빌딩들도 속속 들어섰다. 1980년 2월에 시작한 지하철 3호선 공사는 동호대교를 건너 강남 땅으로 들어왔다. 압구정, 신사, 잠원, 고속터미널, 교대, 남부터미널을 거쳐 양재를 종점으로 한 3호선은 1985년 10월에 완공됐다. 한 참이 지난 뒤 3호선이 연장되지만, 이 노선도 2호선 만큼은 아니더라도 강남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잠실야구장은 1982년 7월에 완공돼 그 해 9월 세계야구선수권 대회를 치렀다. 나이든 사람들에게 추억으로 남아 있는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 그리고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우승은 야구장 건설 후 처음 치른 국제대회였다. 잠실의 스포츠 단지는 1984년 가을에 완공했다. 하지만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치른 뒤 잠실 주경기장은 애물단지가 됐다. 최근엔 잠실종합운동장 적자가 매년 100억 원에 달하자 야구장의 광고료를 올려야 했다. 한국 프로야구의 실력은 ‘상대적으로’으로 나아지지 않았으나 여성 고객 확보 등 마케팅에 상당부분 성공하면서 사업성에 관한 가능성을 알렸다.

한강 개발을 통해 강남의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됐지만 오염 또한 심해졌다. 이에 따라 1982년 9월 한강종합개발 사업이 막을 올렸다. 수중보 설치, 둔치 정비, 저수로 사업 등이 실시됐고 올림픽대로를 건설했다.

서울 올림픽이 실시되기 전인 1988년 8월엔 55층짜리 무역센터를 완공했다. 서울시 특혜 덕분에 무역센터는 등기도 하지 않은 채 올림픽 전에 문을 열 수 있었다.

하지만 잠실이 진정한 강남권으로 편입된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아시아선수촌 아파트와 올림픽선수촌 아파트였다. 아시아선수촌 아파트는 성납갑들을 세워놓은 모양을 한 첫 번째 대단지 아파트였다. 그 시절 한국 아파트의 상징처럼 돼 있는 아시아선수촌아파트는 2000년대 들어 송파구가 8학군에서 제외되자 급격히 쇠락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아시안 게임이 끝난 뒤 한국은 1987년 민주화 열풍에 휩싸였다. 이후 올림픽의 해인 1988년부터 송파구가 강동구에서 분리됐으며, 서초구도 강남구에서 떨어져 나왔다. 송파구를 강남의 3형제에 합류시키는 데 결정적 공언을 한 올림픽선수촌아파트도 완공됐다.

롯데월드의 탄생도 88서울 올림픽과 맞물려 진행됐다. 롯데는 1984년 한양으로부터 3만8천 평이 넘는 토지를 매입하고 정부와 협의를 거쳐 숙박, 위락, 상업 시설을 짓기로 결정했다. 호텔은 올림픽 전인 8월말에 완공됐으나 쇼핑몰과 실내 테마파크는 좀 더 시간이 걸렸다. 호텔 정도만 완공했으나, 롯데월드는 올림픽 때 찾아온 외국인 손님들에게 거대한 ‘외관’을 자랑할 수 있었다.

한 때 시설물이 없어 아시안게임마저 반납해야 했던 한국은 올림픽을 치르는 해에 세계인에게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스포츠 시설뿐만 아니라 롯데월드 등을 통해 한국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음을 알렸다. 지금 시각에서 보면 롯데월드는 한국 대형복합상업건물의 ‘시조’가 되는 건물이었다.

▲ 더욱 확장된 강남

직원을 머슴이라고 부르던 기억이 생생한 한보그룹 회장 정태수는 기이한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그는 세무공무원을 그만두고 1974년 한보상사를 창업해 대치동에 저층 아파트를 지었다. 농사를 짓던 저지대의 땅에 14층짜리 26개 동, 4424세대에 달하는 초대형 단지가 들어섰다. 이렇게 은마아파트는 7만 3천 평이 넘는 땅에 들어섰으며, 호사가들 사이에 정태수란 인물은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풍수지리와 미신을 신봉한 정태수는 제 5공화국과 함께 한 단계 더 도약했다. 반포 미도아파트, 목동 신시가지, 지하철 3호선 연장 공사 등 강남 건설사업으로 한보는 30대 그룹까지 올라섰다. 로비의 귀재이기도 했던 정태수는 수서, 일원의 땅을 사 모으면서 강남의 황태자가 될 듯했다.

하지만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뒤 주택 200만호 건설을 국정목표로 삼고 전국의 주요 도시 주변에 있는 토지를 거래신고지역으로 묶어 버리자 한보가 수서에 사 모은 5만평은 꼼짝달짝 못하게 됐다. 정태수는 청와대와 정치권 등에 끊임없이 로비를 벌였고 직접 대통령 노태우를 만나 100억 원을 전달하기도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역경을 뛰어넘던 한보그룹은 한 때 재계 14위까지 성장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 노태우 대통령의 뇌물수수 사실이 밝혀졌고 한보도 문민정부 말기에 무너졌다. 수서지구는 서울시로 넘어갔고 결국 공영개발이 진행됐다. 1994년 이 일대엔 41개 동 1만2천세대가 넘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IMF 외환위기가 닥치기 전 한보는 무너졌으며, ‘한국의 보물’(한보)같은 기업을 만들겠다는 정태수는 해외로 도피했다. 그는 재벌 회장들이 비리로 검찰에 불려갈 때 휠체어를 타는 관행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노태우 정권이 1988년 들어선 뒤 한국의 주택은 일대 개벽을 한다. 당시 서울의 주택수가 160만호, 전국을 다 합쳐도 700만호였지만 노태우 정권은 무려 200만호를 짓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가운데 90만호를 수도권에 건설할 예정이었다. 바로 분당, 일산, 중동, 산본, 평촌과 같은 제1기 신도시가 중심이었다.

이 가운데 분당은 596만평에 달하는 넓은 면적에 39만 명, 9만7500호를 수용하는 초대형 신도시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분당은 강남의 연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토지공사, 도로공사, 가스공사, 주택공사, 한국통신 등 많은 공기업이 이곳으로 이전했다.

분당에 집을 사려는 사람의 주축은 가격이 강남아파트의 40%에 불과한 분당 아파트를 사서 평수를 넓히려는 강남 주민들이었다. 여기에 전문 투기꾼과 신혼 부부 등 수도권의 무주택자가 가세했다. 아파트에 첫 입주가 시작된 시기는 1991년 9월이었다.

초기 편의시설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던 분당은 1993년 12월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로 한 단계 더 도약했다. 이 무역협정이 타결되자 대형 유통업체들은 1996년 유통시장 완전개방을 앞두고 할인점 사업에 뛰어들었다. 분당은 유통 격전지가 되면서 크게 각광받는 도시로 변모했다.

▲ 강남 투기의 선구자 박종규

청와대 내엔 부동산 투기의 원조로 꼽히는 실력자가 있었다. 바로 유신정권의 실세 박종규였다. 박종규는 대권 욕심을 내던 김종필, 권력에 탐닉하던 이후락과 달리 오로지(?) 대통령에게만 충성하는 면모를 보였다. 그런 그가 관심을 보인 게 강남 땅이었다.

1970년 경 박종규는 서울시 도시계획과장 윤진우에게 향후 한강의 남쪽 땅 가운데 가장 유망한 곳을 물어본 뒤 윤진우에게 그 곳(지금의 강남구)을 사 모으라고 지시한다. 제일은행 아무개에게 가면 돈을 줄 것이니, 그 돈으로 땅을 사라고 했다.

서울시 일개 과장이었던 윤진우는 범접하기도 힘든 권력자의 눈에 들어 팔자가 핀다. 그가 1970년 5월에 사 모은 땅은 24만평, 12억 7천만 원 수준이었다. 윤진우는 토지 매입 대금의 3%를 판공비로 쓸 수 있었다.

당시 40평짜리 아파트가 500만원 좀 넘는 수준이었다고 하니, 윤진우는 이런 아파트를 열 채 이상 살 수 있는 돈을 판공비 명목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윤진우는 이듬해인 1971년 초부터 사뒀던 토지를 매각해 대략 20억 원, 지금의 가치로는 6천억 원 남짓한 자금을 마련해 상납했다. 이 돈은 1971년 4월 박정희가 김대중과 맞붙은 대통령 선거와 5월 총선에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남 부흥의 신호였던 제3한강교의 기공식이 열린 1966년 이후 강남은 땅 투기의 본고장이 됐다. 지하철 3호선 양재역 동남쪽에 있는 말죽거리의 땅을 사면 떼돈을 번다는 소문도 있었다. 실제 1966년 초 평당 200~400원 수준이던 말죽거리 땅값은 2년 후에 평당 6천원으로 뛰었다. 말죽거리 신화는 강남 부동산 가격 상승을 상징하는 말이 됐다. 1970년대 후반엔 복부인이란 신조어가 등장했으며, 영화감독 임권택은 1980년 땅을 사랑하는 유한 마담들의 이야기를 담은 ‘복부인’을 만들었다.

그 시절 이후 한국에서 방귀 깨나 뀌는 사람들이 터를 잡은 곳이 강남이다. 이명박 정부의 내각은 강부자(강남 땅부자) 내각으로 불렸다. 정권이 바뀌어도 권력자들은 강남에 터전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대략 1급 이상 공무원의 30% 가량이 강남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남은 대기업과 금융사의 임원, 그리고 권력자들이 이웃을 이루면서 ‘주민’들의 이익증진에 힘을 썼다. 참여정부 때 만들어진 종부세가 이명박 정부 들어 강남 지역구 국회의원들에 의해 무력화되기도 했다.

▲ 삼풍, 강남의 탐욕과 비극

성수대교 붕괴 참사가 난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55분. 서초동 삼풍백화점의 5층짜리 건물 2개동 가운데 하나가 무너졌다. 당시 단일 매장으로 한국 최대의 백화점이었던 삼풍백화점의 창업주는 통역장교 출신 사업가 이준이었다.

그는 박정희의 5.16 쿠데타 이후 군복을 벗고 중앙정보부 창설 멤버가 된다. 중정에서 퇴직한 뒤엔 사업가가 됐다. 중정의 인맥을 활용해 순복음교회, 을지로 삼풍상가 등을 건설하면서 부를 축적했다. 무엇보다 1974년에 사놓은 서초동 땅이 효자노릇을 했다. 이준은 1987년 이 땅에 50평대가 넘는 대형 평수의 삼풍아파트를 짓기도 했다.

삼풍백화점은 사고 20일전부터 건물이 흔들렸고 5층에는 물이 새고 옥상에 금이 갔다. 하지만 사고 13일 전에 실시된 안전진단에선 ‘이상 없음’ 판정을 받았다. 사고 당일에 4층 천장 일부가 내려앉는 사고도 있었지만, 회사의 위기불감증은 엄청났다. 4시 회의에서 ‘영업을 계속하면서 보수공사를 한다’는 결정을 낸 것이다. 건물의 붕괴가 진행되는 와중에 회사는 엉터리 안내방송을 하면서 고객들의 탈출을 방해하기도 했다. 결국 5시57분 건물을 지탱하는 5층 기둥 2개가 쓰러지고 옥상의 모든 시설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건물 전체가 붕괴됐다. 직원과 고객 등 502명이 사망하고 937명이 부상당한 해방 이후 최대 참사였다.

이 사고로 단 6명이 구속됐으며 건물 일부를 지었던 우성건설은 부도를 맞았다. 사고 수습도 원활하지 못해 난지도 쓰레기처리장에서 희생자의 유품과 사체 일부가 발견되기도 했다. 지난 2014년 일어난 세월호 참사와 상당히 비슷했으며, 재물에 대한 인간의 어마어마한 탐욕이 인명을 앗아간 인재였다.

삼풍에 구상권을 행사해 삼풍그룹을 인수한 서울시는 보상금 마련을 위해 1999년 삼풍백화점 부지를 2천억 원 가량에 대상그룹으로 넘겼다. 대상그룹은 대림건설과 함께 초호화 주상복합건물 아크로비스타를 건설한다. 아크로비스타 앞 표지석엔 삼풍백화점 참사에 관한 내용 대신 세종대왕 몇 째 아들의 후손이 그곳에 살았다는 내용만 적혔다.

장태민 기자 chang@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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